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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날이 좋았다.

그녀와 기린인형 _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생각.

때는 2008년. 내가 대학교 3학년 1학기. 학기초에.

 

전쟁같은 수강신청을 마치고, 좋으나 싫으나 들어야 했던 전공필수 제어공학 수업에,

낯선 얼굴의 여학생이 교실에 앉아있었다.

학부생은 많고, 어느하나 휴학하거나, 편입해 들어온다 한들, 별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그 친구는 유독 마르고, 키가 작았고, 까만 피부에 안경을 쓴, 조금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고, 쉬는 시간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비쳤다.

그당시 나는 흔히 말하는 인싸도, 학생회도 아니었지만 나름 어울리는 작은 그룹이 있는 조금 차분하지 못했던 학생.

나와의 대화가 반가웠을지도 모르겠다.

수업을 마치고 우리는 같이 학식을 먹었다.

그 친구는 편입생이며,  자취 중인데 학교생활이 아직 낯설다고 뭐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것 같다.

다음 수업이 달라 우리는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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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전공이지만, 학부생이 많고 전공필수 수업도 보통 2개 이상 개설이 되었기 때문에

시간표가 안 겹칠 수도 있었지만

그아이와 나는 3과목의 전공이 겹쳤다.

 

그 뒤로도 수업시간에 종종 마주치며 반갑게 인사하고, 가끔 같이 학식을 먹으며

조금 알고 있는 "같은 과 친구" 관계를 이어 갔고,

중간고사때는 서로 구한 족보를 교환하며 나름 꽤 친해졌었다.

 

그 친구는 그 뒤로 나에게 매일같이 "뭐해?" 라고 문자/ 네이트온을 보냈고,

처음 몇번은 반갑게

"어~ 과제하고 있어~" 또는 "도서관 가는중이야~" "친구들이랑 놀고있어~" 라고 응답을 했었지만

항상 그 뿐이었다. 

 

대화의 성격이 뭔가 할말이 있어서 대화를 한다거나,

Small talk정도로 가볍게 갔어도 되는데,

내 대답 뒤에는 항상

응. 또는 그렇구나. 로 대화가 맥없이 끊어졌다.

 

내가 먼저 "밥 먹을래?" "너도 올래?" 라고 말 해주길 기다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별 생각 없었다.

매일같이 뭐해? 라고 묻는 그 친구의 질문에 나는 점점 응답을 안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귀찮아지기까지 했다.

 

그 친구의 "뭐해?" 도 줄어들었다.

 

그리고 방학이 지났고 가을 학기가 시작될 때,

연애하느라 무척 바빳던 나를 누군가가 길에서 붙잡았다.

 

바로 그 친구였다.

잘 지냈느냐고, 작은 인사를 건넸는데 불쑥

커다란 기린인형을 선물 하는것이 아닌가.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ex 남자친구) 선물 하려다가 실패했는데 우연히 나를 발견했거나,

그냥 이 인형을 오늘 처음 만나는 친구에게 선물 하기로 마음 먹었을수도 있고...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받기에는 너무 예쁘고 커다란 기린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휴학을 한다고 했고

그 뒤로 소식이 끊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툴러서 그랬던 것일까.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것일까.

 

미안하기도 하고 왜 좀더 차분하게 들어주지 않았는지.

왜 더 대화를 이어가도록 노력하지 않았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심지어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는데,

그런 일련의 상황은 너무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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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에 딸래미가 조금 더 깊은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될 때,

어떤 말들을 어떻게 해 줄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 많은 요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너에게 주는 관심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 상황이라면 진정성 있게 반응해 주거라 고,

 

엄마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라는 반문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과거에 부정적인 행동을 했다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는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지금이라도 그게 잘못임을 인정하고 후회하고 있는거라면,

네가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도록, 나는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친구야.

어디서 뭐하며 잘 살고 있는지,

그때 인형 너무 고맙고.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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